2022년 대선 향한 ‘오디세이’
김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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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오래전 읽은 소설이 생각난다. 광고 대행사의 카피라이터인 주인공은 황당한 광고 의뢰를 받는다. 고객인 마스크 제조 회사가 “전 국민이 마스크를 쓸 수밖에 없는” 광고를 주문한 것이다. 소설 마지막에 주인공은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면서 방금 넘기고 온 카피에 대해 흡족해한다. “아십니까? 미국의 ○○○○박사가 AIDS가 공기를 통해 감염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것을….” 희미한 기억에 의하면 대략 이런 콩트였다. 전 국민이 아니라 전 세계인이 마스크를 쓴 현실을 보며 작가는 무슨 생각을 할까.카이스트의 김대식 교수는 2020년에 ‘진정한’ 21세기가 시작되었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2020년은 ‘새로운 문명’이 시작된 해일지도 모른다. 역사가들은 ‘코로나19’를 ‘산업문명’에서 ‘디지털문명’으로의 이행을 가속화한 변곡점으로 기록할 수도 있다. 코로나19는 아주 짧은 시간에 모든 사람의 생각과 행동 방식을 바꿔 놓았다. ‘팬데믹’으로 가속화된 ‘언택트’ 사회는 일하는 방식, 소비하는 방식, 제품과 서비스를 파는 방식, 지식과 정보를 얻는 방식, 여가를 즐기는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 심지어 예배를 드리는 방식마저 바꿔 놓았다.한국의 코로나19 감염자에 대한 동선 추적 방식에 대해 프랑스의 몇몇 지식인들이 ‘개인의 자유’ 희생과 ‘사생활’ 침해라며 ‘감시 사회’ 한국을 고발했다. ‘민족’의 독일과 비교해 ‘개인’의 프랑스라는 자부심이 강한 나라다운 비판이지만 따지고 보면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도 데카르트 이후 ‘근대’의 산물일 뿐이다. 미국도 2001년 ‘9·11 테러’ 이후 공항에 이른바 ‘알몸 투시기’로 불린 전신 검색대를 설치할 때 인권 침해라며 강하게 반발했지만 결국 설치를 막지 못했다. 공포 앞에 장사 없다.‘근대국가’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이 절대적 가치로 여겨졌지만 디지털문명에서는 어쩌면 ‘프라이버시’가 종말을 맞을 수도 있다. (우리와 일체가 돼 이젠 분리가 불가능해진) 디지털 기기는 시나브로 프라이버시의 종말로 몰아가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인류는 ‘인간’ ‘기계’ ‘자연’이 지혜롭게 공존해야 하는 새로운 문명을 맞고 있다. 공존의 지혜를 찾지 못하면 파멸이 예정돼 있다. 우리는 ‘문명의 전환’ 급류에 속절없이 떠내려가고 있다.
코로나로 세상도 유권자도 변해
지난 총선, 새 시대 ‘첫’ 아닌
한 시대 마감한 ‘마지막’ 선거
좋아서 필요해서 상대가 싫어서
통합당, 이 셋 다 민주당에 져
정치적 지배력 잃지 않으려면
이기거나 유능한 정당 돼야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국제 정치 질서도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있다. 미·중의 신냉전은 기술패권전쟁이다. 미·소 냉전처럼 선택이 쉬운(?) 문제가 아니다. 미국과 (세계의 공장을 넘어 세계의 시장이 된) 중국 사이에서 어느 한쪽에 서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특히 지정학적 가치에 지경학적 가치가 더해진 한반도는 여전히 ‘열전’ 지역이다. 미국 우선주의와 중국 민족주의가 ‘기술패권’을 놓고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국내 정치 지형도 근본적으로 바꿔 놓고 있다. 이미 지난 총선에서 여러 징후가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2020 총선’을 새로운 시대의 첫 번째 선거가 아니라 ‘한 시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선거로 평가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혹은 ‘디지털 시대’의 정치는 산업사회의 유산인 보수·진보, 좌파·우파라는 용어를 ‘낡아서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세상은 변했고, 당연히 유권자도 변했다. 그러니 2022년 대선 이슈도 달라질 것이고, 시대가 요구하는 대통령도 다를 것이다.<정치 인사이드 시즌 2>는 2022년 대선을 향한 ‘오디세이’다. 두려운 여정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지난 총선은 정치 캠페인의 경험이 많은 내가 처음으로 변화의 흐름을 놓친 선거였다. 총선 결과는 내 시나리오에는 없었다. 나는 (선거 당일에도) 범여권 대 범야권을 170대 130 정도로 봤다. 나는 패널로 참여한 KBS의 <정치합시다>에서 이번 총선은 한쪽이 ‘경악할’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줄곧 예측(?)했지만 정작 경악한 것은 나였다. 세상의 변화와 민심의 흐름을 읽는 것이 갈수록 힘겨워지고 있다. 이 여정이 두려운 이유다.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지난 몇 년의 흐름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2018년 지방선거에 이어 2020년 총선에서도 역사적 승리를 함으로써 드디어 대한민국 정치의 ‘주류’가 되었다. 네 번의 연속 승리로 민주당의 ‘정치적 영토’는 역사상 최대로 확장되었다.
노무현·문재인의 청은 ‘여민관’
이명박·박근혜 땐 ‘위민관’
국민 향한 두 세력 시선 보여줘
민주당도 ‘새누리 몰락’ 잊으면
이 승리, 축복 아닌 재앙될 수도
정치적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생각대로 현실을 바꿀 힘을 갖거나, 현실에 맞춰생각을 바꾸는 적응력이 있어야 한다. ‘독재’를 하거나, ‘선거’를 잘하거나 둘 중 하나다. 독재가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면 ‘캠페인 정당’으로 변해야 했는데 보수는 변화에 게을렀다. 기업으로 치면 ‘독점’을 하거나 소비자가 ‘사고 싶은’ 제품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정당이든 기업이든 혁신을 통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지배력을 잃는 건 한순간이다. 보수가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보다 세상이 보수를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다.정치적 지배력을 잃지 않으려면 선거를 잘하는 ‘이기는 정당’이나 국정운영을 잘하는 ‘유능한 정당’이 되어야 한다. 보수 정당이 둘 중 하나만 잘했어도 네 번 연속으로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설득의 수단으로 ‘에토스·파토스·로고스’의 세 가지를 제시했다. 에토스는 메신저의 신뢰, 파토스는 메시지의 정서적 공감, 로고스는 메시지의 논리다. 믿을 만한 사람이, 믿을 만한 메시지를, 대중의 공감을 얻을 수 있도록 전달해야 설득할 수 있다.진중권 전 교수가 “1월하고 2월에 야당 노릇 솔직히 저 혼자 했잖아요” 말했을 때, 그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진중권은 ‘민주당만 빼고’ 찍자는 진영에서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를 모두 갖춘 (거의 유일한) 논객이자 전사였다. 반면 미래통합당은 신뢰·공감·논리에서 형편없는 메신저였다. 결국 유권자가 정당을 선택하는 세 가지 기준인 ‘좋아해서’ ‘필요해서’ ‘상대가 싫어서’에서 모두 민주당에 압도당했다. 특히 ‘필요해서’ 찍는다는 것마저 빼앗긴 것은 뼈아프다.노무현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동의 이름은 ‘여민관(與民館)’이었다. 이명박 정부 때 ‘위민관(爲民館)’으로 바뀌어서 박근혜 정부 때까지 유지되다 문재인 정부가 다시 ‘여민관’으로 돌렸다. 두 이름은 두 정치세력의 정체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더불어’는 ‘국민이 주인인 정부’를 내세운 민주당의 정치철학을 잘 반영한 이름이다. ‘국민을 위하여’는 자칫 청와대가 주체가 되고 국민은 객체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민’과 ‘위민’은 ‘대중주의’와 ‘엘리트주의’를 잘 드러낸다. 엘리트주의는 ‘능력’ ‘품격’ ‘희생’의 이미지가 강점이지만 최근 한국 보수는 이 세 가지를 모두 상실했다.보수가 ‘유능하다’는 이미지를 잃은 것은 민심의 흐름을 놓쳤기 때문이다. 만약 2000년 이후 민심의 변화를 예민하게 관찰했다면 한반도 이슈에 있어 통일에서 ‘평화’로 민심의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세계화와 기술혁신으로 심화된 부의 양극화 이후 부쩍 커진 ‘복지’ 확대의 목소리도 누르지 않았을 것이다. 일자리가 사라지고 소득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시장에 대한 신뢰보다 ‘정부’에 대한 의존이 점점 커지고 있는 현실도 무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외교·안보에서 미국만 따라가다가 중국의 부상과 미국 우선주의 앞에서 길을 잃지도 않았을 것이다.보수가 시대착오적으로 이념에 집착하는 지난 10년 동안 보수 담론은 국민의 지지를 계속 잃어왔다. 전통적인 보수 담론은 이제 소수파가 되었다. 그러니 코로나19로 인해 ‘정권 심판’이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비호감도가 높은 야당이, ‘대안’이라는 인식도 심어주지 못하고, 정권을 찾아올 수 있는 ‘강한 대권주자’도 없었으니 어떻게 이기겠는가.2017년 대선에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얻은 득표율이 24%, 2018년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 후보들이 얻은 득표율이 27%, 그리고 2020년 총선에서 미래통합당 후보들이 얻은 득표율이 41%로 점점 좋아지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건 착시다. ‘흔쾌히’ 찍은 유권자는 거의 늘어나지 않았다. ‘마지못해’ 찍은 유권자만 늘어났을 뿐이다. 총선 패배 후 갤럽 조사에서 미래통합당 지지율이 20% 밑으로 도로 떨어진 데서도 알 수 있다. 미래통합당은 ‘찍고 싶은’ 정당이 아니라 ‘찍어 주는’ 정당으로 전락했다.김종인 비대위원장은 ‘비상이 일상’인 정당을 성공적으로 수술할 수 있을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공천권을 갖고 있는 총선 전의 비대위원장은 무소불위의 계엄사령관이지만 총선 패배 후의 비대위원장은 ‘권한대행’일 뿐이다. 그렇다고 확실하게 뒤를 받쳐줄 대주주나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호시탐탐 낙마를 노리는 적들만 우글거릴 뿐이다. 오직 개인기(?)로 1년을 버틸 수 있을까.예상되는 세 가지의 시나리오가 있다. ①김종인 비대위가 성공적으로 당을 개혁하는 시나리오다. 김종인 위원장이 원하는 대로 ‘보수’나 ‘자유 우파’ 같은 이념적 색채를 싹 지우고 ‘기본소득’을 비롯한 ‘포스트 코로나’ 이후의 의제를 주도하는 당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보수·진보의 구도를 해체하는 구상이다. 윤석열(정치 참여를 결심한다면) 검찰총장이나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까지 끌어들여 2022년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과 사실상 일대일로 맞붙는 시나리오다.②기득권의 저항으로 김종인 비대위가 좌초하는 시나리오다. 미래통합당은 영남을 중심으로 보수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정당이 될 것이다. 그럴 경우 대선을 앞두고 새로운 3당의 출현 가능성은 높아진다. 이 정당은 미래통합당의 개혁파와 민주당의 비문 일부가 참여할 가능성이 있다. 총선에서 민주당을 지지했던 49% 중 적어도 15%의 잠식을 목표로 할 것이다.③(우여곡절은 있겠지만) 김종인 비대위가 유지되면서 보수의 정체성을 강하게 주장하는 세력이 이탈해서 독자 정당을 만드는 시나리오다. 복당이 허용되지 않은 홍준표나 당내에서 입지가 좁아진 황교안, 그리고 김종인의 정체성에 동의할 수 없는 유승민의 이탈 가능성이 있다. 이들이 이탈할 경우 윤석열이나 안철수는 김종인당에 합류할 가능성이 있다.시나리오의 실현 가능성은 아마도 ②, ③, ①의 순일 것이다. 대선 승리 가능성은 ①, ③, ②의 순일 것이다.민주당은 새누리당이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승리한 직후 몰락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2020년 총선의 큰 승리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일 수도 있다. 오만해진 권력이 (미래와 통합이 아닌) 과거와 분열의 길로 들어서면서 보수가 몰락한 전철을 밟지 않아야 한다.다시 한번 말하지만 2020년 총선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첫 선거가 아니라 한 시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선거였다. 아마도 2022년 대선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첫 번째 선거일 것이다. 함께 대선을 향한 긴 여정을 떠나보자.
출처: 경향신문 ▶필자 박성민
1991년 설립한 정치컨설팅그룹 ‘민’의 대표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정치컨설턴트다. 30년 이상 선거를 치르면서 익힌 감각과 예리하고 독창적인 시각을 평가받고 있다. 정치게임에서 승리하는 법칙을 담은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긴다> <정치의 몰락>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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